노동단체를 결성 시기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5년 : 동경조선노동공생회,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동경조선노동조합
≪ … 중 략 … ≫
Ⅱ. 1920년대의 문화통치
1919년의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을 계기로 국내외에서 민족운동이 발전.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전 세
민족협동전선에 참여하는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정우회 선언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과거의 분열에서 벗어나 사상단체를 통일하고 구체적으로 전위적 운동을 행하여야 한다. ② 교육을 통하여 대중을 조직화하고 질적, 양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그것을 기초로 일상투쟁을 하여
민족으로 간주한다.
2. 민족자결은 오늘날 無用이다. 무산계급의 해방을 제1의적 急務로 한다.
3.민족차별을 철폐하고 계급타파에 분투한다는 내용이 있다.
1924년 4월에 열린 서울파 주도의 조선총동맹의 임시대회에서 혁명적 민족운동은 찬성한다는 내용이 가결되었고 북풍회 또한 그들의 강령에서
운동의 인식의 변화, 활동방식의 변화, 중심주장의 변화 등을 바라보고자 한다. 1930년 이후 청년학생운동에 대한 서술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진영을 중심으로 다루었는데, 이는 이시기 청년학생운동의 변화의 주요한 원인과 주체가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변화와 함께 맞물리기는 것과 민족주의 청년학생
민족의 압제는 오히려 한민족의 자각을 강하게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한민족의 자각은 1919년 3.1운동을 거치면서 자아에 대한 각성과 함께 민족의 현실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주축으로 그 시야가 확대되었다.
1910년대를 '문학의 과도기'라고 볼 때, 1920년대는 '문학의 성숙기'라고 볼 수 있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생활터전을 닦고 한인사회를 이룩했다. 이 가운데 한인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된 곳은 블라디보스톡(해삼위)이었다. 이곳에는 1893년에 이미 한인들의 밀집 거류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1907년에는 1만 400명의 한인들이 거주했는데 이는 블라디보스톡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숫자였
운동 직전까지 수원교구에서 傳敎師, 共宣員, 典制員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때에는 보성전문학교 학생으로 탑골공원과 태화관의 상황을 연락하였으며, 수원과 남양 제암리에서 3.1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는 天道敎靑年會 水原支會를 창립하고 초대 支會長으로, 천도교중앙총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다수의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으므로 러시아 혁명의 영향은 더욱 직접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혁명정부가 일련의 선언 등을 통해 독립과 평화와 평등을 천명했으며, 실제로 민족해방운동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의해 사회주의 이념으로의 경도는 가속화 되었다.